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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번째 수능을 준비하는 동안 나를 잃었다.
지난 19년간 전혀 갖지 못한 감정의 폭풍이었다.
나의 부족을 깨닫고 한계를 느끼며 패배감과 상실감이
가득한 우물 밑으로 끝없이 내려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항상 낙천적이고 안좋은 일들도 쿨하게 넘기던 내 성격은 폐쇄적으로 변했고,
한번 우울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가 없어 그냥 그대로 또 다음 하루를 살고, 다음 하루를 살았다.
다가오는 시험 날짜의 압박감은 두려움이 되었고,
하루가 끝나면 내일 하루가 또 남아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물론 자신감과, 자기 확신도 분명 있었다. 올 1년간 난 정말 열심히 살았고,
그 공부는 절대 헛되이 되지 않을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두 번째 수능 당일날 아침에 1시간 일찍 도착해서
자신감이 넘치는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 들어가던 나를 분명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강OO’는 철저히 패배했다.
편도열차를 타고 떠났는데 돈이 없어 돌아가는 차편을 구하지 못하는 느낌.
그런데 그 사실을 열차를 타자마자 깨달았다.
지갑도 핸드폰도 아무것도 없더라.
아빠와 시간을 보내고, 엄마에겐 차마 말하지 못하겠어
밤 늦게 장문의 문자를 통해 내 상황을 설명했다.
금요일 오전, 엄마로부터 위스콘신주립대에 대한 기사 링크가 도착했다.
토요일에 설명회에 혼자 참석했고,
끝나고 간단한 상담으로 많은 정보를 얻었다.
대학 진학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빛이였고, 희망이 있는 장래가 그려졌다.
원서접수, 자기소개서 후 다음 단계인 면접날이 되었다.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분명 간단한 대학 면접이라고 마음 편하게 오라고 전해들었는지라
문자 그대로 부담없이 찾아간 곳은 면접실에 입장하면서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며 들어간 방에는 돌아오는 인사 없이 고개 숙이고
말없이 서류만 바라보는 냉정한 표정의 면접관이, 그리고 나에게 “문제”가 여러 개 보인다는
불편한 말을 시작으로 인터뷰가 아닌 불가피한 진로코칭이 시작되었다.
덥고 부담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선생님(면접관=선생님으로 칭하고자 함)과
말을 주고 받다 보니 어느새 3시간이 흘렀다.
나는 고등학교 때 꿈과 희망이 가득하던 나를 다시 찾았다.
내가 왜 의사를 하고 싶어 했었는지 다시 떠올랐다.
나는 당장 내 3년을 떠올렸고, 되돌아 봤고
그 이상으로 중학교 3년, 초등학교 6년 총 12년간 내 삶이 불현듯 머리 속을 지나쳤다.
매일 매순간 경쟁을 하면서도 항상 즐겁게 공부했고,
지금과 다르게 순간의 긴장감을 즐겼었더라.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정말 별 거 없었다.
우연히, 감사하게도 남들보다 일찍 공부를 접했는데 재능이 있었고,
재미도 있어서 결과도 좋았다.
그리고 중학교 때 법의학자를 꿈꾸던 강OO는 고등학생이 되어 흉부외과 의사를 거쳐 신경과 의사 및 대학병원 교수를 꿈꾸었고,
의대 진학을 위해 혼신을 다한 3년을 보냈다.
봉사활동 하나하나 희망진로와 관련된 분야의 기관들과 직접 접촉하고 독서 활동 하나하나 고르고 고르며 신경썼다.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했고, 모든 노력들이 정말 즐거웠다.
이게 나였다. 진로 코칭 후 다시 꿈을 꾸게 된 것보다, 꿈을 다시 꿀 수 있다는 희망이 나를 더 설레게 하였다.
나는 국경없는 의사회의 멤버가 되어, [의료빈민국]과 [상대적 선진국의 의료소외빈민촌]을 돌아다니며
봉사하는 미래를 그렸던 순수한 17살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지금 21살을 앞둔 강OO는 유학이라는 소중한 기회를 잡아 신경과 의사가 되어 일생을 통증연구에 바치고 싶다.
힘들 게 뻔하지만 일단 부딪혀 볼 것이다.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성공은 행복을 데려오지 못하지만 행복은 성공을 데려온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듣던 그 순간에도 신선하게 다가왔지만, 곰곰히 생각할 수록 뇌리에 박히는 표현이다.
나는 행복을 추구하여 성공까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인생을 살고 싶다.
위스콘신대학교 한국대표
T. 02.548.0570